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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23.02.01 [10:10]
충무공김시민 장군의 생애와 업적
 
허용기

 본자료는 충남역사문화연구원의 디지털천안문화대전 제작 관련 김시민장군과 김득신선생에 대한 원고 집필 의뢰에 따라 '충무공 김시민장군기념사업회'허용기회장이 작성한 내용이다.

충무공김시민 장군의 생애와 업적



목차


1. 김시민

1) 가계

2) 출생 및 성장과정

3) 과거급제 및 공직생활

4) 유허지

2. 김득신

1) 출생 및 성장과정

2) 활동사항

3) 유적지

3. 진주대첩

1) 개요

2) 김시민의 활약상

3) 진주대첩의 역사적 의미

4) 추모행사

4. 김시민과 김득신 관련자료

1) 김시민 관련자료

2) 김득신 관련자료



1. 김시민


1) 가계


(1) 김시민의 혈통


김시민(金時敏, 1554∼1592)은 1274년 여몽연합군이 일본을 정벌할 때 고려군사령관이었던 충렬공 김방경(金方慶)장군의 13세손이다.

김시민의 할아버지인 김석(金錫, 1495∼1534)은 조선조 중종 기묘년(1519)에 진사에 급제한 인물로 정암 조광조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소학으로써 자신을 다스려 사림(士林)의 두터운 신망을 얻었으며,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25세 되던 해에 모친(의성김씨)을 모시고 부인(행주기씨) 및 장남인 충갑과 함께 지금의 충북 괴산군 문광면 문법리 낙촌(樂村)으로 내려와 은둔생활을 하였다. 김석은 슬하에 충갑(忠甲)·효갑(孝甲)·우갑(友甲)·제갑(悌甲)·인갑(仁甲) 등 다섯 명의 아들을 두었으며, 40세를 일기로 별세하여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에 장사지냈다.

김석의 다섯 아들 중 장남인 충갑(1515∼1575), 둘째인 효갑(1520∼1560), 넷째인 제갑(1525∼1592)은 각각 문과에 급제하였고, 셋째인 우갑(1522∼1581)과 다섯째인 인갑(1534∼1594)은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조선 당대에서 한 형제 중에 3명이 대과에 급제하고 2명이 진사시에 합격한 예는 거의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드문 일로써 세상에서는 이들 오갑(五甲)이 받은 홍패, 백패로 구첩병풍을 만들었다 하여 이를 홍백병(紅白屛)이라 일컬었다.


(2) 김시민의 부친과 숙부들


김시민의 부친인 김충갑(金忠甲)은 1515년(중종10)에 한양 남산 아래 주자동(鑄字洞)에서 태어났다. 호가 귀암(龜巖)으로 이문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부친상을 당하여 3년 시묘를 마친 뒤 20세 되던 해인 1534년(중종29)에 동생 제갑과 함께 퇴계 문하로 들어가 수학하였다. 이때 기대승, 조호익, 이정 등과 교유하였다. 퇴계 문하에서 수학하던 중 9개월 만에 ‘학문은 그만하면 되었으니 목민관의 길을 가라’는 스승의 말에 따라 1543년(중종38)에 사마 양시(司馬 兩試)에 합격하고, 1546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였다. 이때 성균관의 유림들과 함께 요승 보우(普雨)를 배척하는 상소문을 올려 당세에 이름을 날렸고, 이 해에 발생한 을사사화(乙巳士禍)에 연루되기도 하였다.

이듬해인 1547년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로 있던 충갑은 양재역 벽서사건이 일어나자 다시 이에 연루되어 청주(현재의 천안시 동남구 수신면 장산리 장명)로 유배를 가게 된다. 명종실록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대사헌 안현 등이 아뢰기를 ‘권지승문원부정자 김충갑은 역신 이휘(李煇)의 처남으로서 평소에 궤론으로 억지 주장을 하였으니… 조정에 있게 해서는 안 됩니다. 관직을 삭탈하여 문외출송하소서’…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과거에 급제한지 1년 밖에 안 된 충갑이 을사사화의 여파로 이어진 벽서사건에 연루된 것은 이휘가 처남(아버지 석의 사위)인 점 등 주변 인물 및 사림파 인사들에 대해서 유화적이었던 소윤계와 가까웠던 이유 때문으로 보인다.


유배 후 21년간을 청주에서 강학(講學)하면서 보내게 되는데 오죽촌(梧竹村)에 거처하며 스스로 오죽산인(梧竹散人)이라 불렀다고 한다. 첫 부인과 사별(1544년) 후 혼자 유배생활을 하고 있던 충갑은 이때 유배지와 이웃한 아우내 백전(栢田)에 세거(世居)했던 창평이씨(昌平李氏) 이성춘(李成春)의 큰딸과 혼인하였으며, 이것이 인연이 되어 충갑의 후손들이 병천면 가전리 백전에 터를 잡게 되었다.


충갑은 선조 즉위 후 이이와 기대승의 상소로 유배에서 해제되었으며, 공조좌랑, 북도병마평사 등을 역임하였고, 양사(사헌부와 사간원)에 재임하면서 강직한 언론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59세 때 모친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하였고, 61세 때인 선조 8년(1575) 괴산에서 사망하였다.

훗날 3남인 김시민이 진주대첩을 이루고 순절한 공훈으로 의정부 좌찬성 겸 의금부사에 추증되고, 상락군(上洛君)에 추봉되었다.


김시민의 둘째 숙부인 효갑은 명종8년(1553)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전임사관과 좌랑 등을 지냈다.


넷째 숙부인 제갑은 중종20년(1525)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자는 순초, 호는 의재이다. 21세 때인 명종8년(155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박사·전적·옥천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이후 진주목사, 충청도관찰사, 우승지 등 중앙과 지방의 요직을 두루 거치다가 임란 발발 1년 전인 1591년에 원주목사로 부임하였다. 이듬해인 1592년에 임란이 발발하자 8월 25일 왜군이 원주를 침공해 오자 경내의 요새인 영원산성(領原山城)으로 군사와 주민을 이끌고 들어가 방어하였다. 그러나 중과부족으로 산성이 함락되자 최후까지 싸우다 부인 및 아들 시백과 함께 순절하였다. 사후 조정에서는 그 충절을 기려 숙종37년(1711)에 문숙(文肅)이라는 시호와 함께 영의정에 추증하였다. 1966년 강원도애국애족부활위원회에 의해 원주역 광장에 충렬비가 세워졌다. 시문집으로 ‘의재유고’(毅齋遺稿)가 전한다. 묘소는 충북 괴산읍 능촌리에 있다.


다섯째 숙부인 인갑은 음서로 출사하여 비안현감을 역임하였다.


이처럼 김시민을 비롯한 숙부들과 형제들이 전쟁의 위급한 상황에서도 도피하거나 적 앞에 굴복하지 않고 죽음으로써 충절정신을 발휘한 것은 현실의 부정에 타협하지 않았던 가학(家學)의 성향에서 비롯된 것이라 볼 수 있다. 특히 김시민과 함께 김시양, 김시헌, 김치, 김소, 김휘 등 여섯 사람이 도원수 또는 절도사로 활약했던 사실을 놓고 볼 때, 문무를 겸비했던 가문의 학문적 성향을 확인할 수 있다.


(3) 김시민의 형제들


김시민은 6남 2녀(시회, 시각, 시민, 시신, 시진, 1녀, 2녀, 시약) 가운데 셋째로 태어났다. 이들 6남 2녀 중 장남인 시회(時晦, 1542∼1581)는 김충갑의 첫째부인인 광주이씨의 소생이고,, 시각(時覺, 1552∼?), 시민, 시신(時愼, 1558∼?), 시진(時進, 1564∼1632)과 두 딸은 둘째부인인 창평이씨의 소생이며, 6남인 시약(時若, 1564∼1627)은 서얼 출신으로 충북 괴산 청천 덕평에서 태어났다.


큰형인 시회는 1567년(선조 즉위년)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71년에 전임사관인 예문관대교로서 홍진, 이이 등과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이후 부평부사, 천안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선조13년(1580)에 한효순, 이항복 등과 함께 홍문록에 올라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이듬해 사망하였다.


시회의 회(晦)자와 시민의 민(敏)자가 한문글씨가 비슷하여 역사적으로 잘못 기록되는 오류를 범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김시민이 부평부사 시절 ‘구황에 전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김시회(金時晦)’의 회(晦)자를 민(敏)자로 잘못 기술한 것으로써 수정이 요구된다.

훗날 시민이 자식이 없이 사망하자 문중에서는 시회의 4남인 김치(金緻, 1577∼1625)를 양자로 입적시켰다.


둘째형인 시각은 생원에 올랐으나 후사를 잇지 못하고 조졸하였다. 넷째인 시신은 임진란에 참의로서 무훈을 세웠고 후에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추증되었다. 다섯째인 시진은 음사(蔭仕)로 훈련교관이 되었으며 무훈을 널리 베풀었으나 광해군대에 벼슬을 하지 않고, 오로지 모친을 지성으로 봉양하였다.



막내 동생인 시약은 1564년(명종19)에 현재의 충북 괴산군 청천면 덕평리(구 청주군 동면 대전리)에서 태어났다. 용모와 기품이 시민과 흡사하여 우애가 각별하였으며 평소에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 임란시 김시민을 도와 진주대첩에서 전공을 세웠다. 시민이 전사하자 유해를 직접 괴산에 모셨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통영군관(統營軍官)으로 관군과 의병을 통솔하여 옥천, 창원, 동래 등지에서 많은 공을 세웠으며, 이로 인하여 서애 유성룡의 천거로 별장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난이 끝난 뒤에는 훈련원 첨정으로 승진되었으며, 선조38년(1605)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1624년(인조2)에 서자 출신임에도 의주부윤에 임명되었다.


시약과 충무공 김시민과 관련된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인조가 하교하기를 ‘누가 능히 팔진도법을 해석할 수 있느냐?’고 묻자, 무장 중에는 대답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는데, 이 때 시약이 나와 주달하기를 ‘신이 적형(嫡兄)을 따라 진주에 있을 때 이 진을 보았습니다.’하였다. 임금이 ‘곧 배열하라’하자 시약이 명에 따라 진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 후 창성부사로 있던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청나라 군대를 맞아 격전을 벌이다가 두 아들과 함께 붙잡혔으나 끝까지 투항을 거부하다 붙잡혀 의주로 압송되었다. 3부자는 항복을 권유받았으나 끝까지 불복하다 장렬히 순국하였다. 1696년(숙종 22) 괴산에 3부자의 충효를 기리는 정려가 건립되었다. 시호로 충숙(忠肅)을 하사받았다.


(4) 김시민의 자손


김시민은 자식이 없이 순국하였는데 문중에서는 사후에 첫째형인 김시회의 4남 김치(金緻, 1577∼1625)를 양자로 입양시켰다. 김치의 자는 사정(士精), 호는 남봉(南峰) 또는 심곡(深谷)이다. 1597년(선조30)에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설서(設書)를 거쳐 1608년 사가독서(賜假讀書)를 하였다. 광해군 때 사복시정(司僕寺正)·이조참의(吏曹參議)·동부승지(同副承旨)·대사간을 거쳐 홍문관교리·부제학 등을 역임하고 병조참지(兵曹參知)에 올랐다. 광해군의 학정이 날로 심해지자 병을 핑계로 관직에서 물러나 두문불출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동래부사로 나가서 청백의 비석을 얻었다. 비명에 이르기를 “보다 맑은 것은 얼음이요, 보다 흰 것은 옥인데 우리 후의 덕행은 얼음과 같고 옥과 같다”하였다.


1625년(인조3)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는데 안동의 행영(行營)에서 졸하였다. 그 때 나이가 49세였다. 후에 안흥군(安興君)에 봉해졌다. 청렴하고 간결하며 준엄하고 정제하여 문무에 재주가 있었다. 또한 역학에 정통하여 명리를 추측함에 기이함이 많았다. 저서로 ‘심곡비결(深谷秘訣)’과 시문집인 ‘남봉집(南峰集)’이 전한다. 이조 8대문장가의 하나인 백곡 김득신이 그의 아들이다.


2) 출생 및 성장과정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김시민은 명종 9년(갑인년) 1554. 09. 23(음력 8. 27) 충청도 목천현 백전동(栢田洞, 현재의 충남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가전리 잣밭)에서 안동김씨(安東金氏)인 父 김충갑과 母 창평이씨(昌平李氏) 사이에서 4남 2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김시민의 자(字)는 면오(勉吾)이고 호(號)는 충무(忠武)다. 부인은 부여서씨(扶餘徐氏)로 부사과(副司果) 서응문(副司果 徐應文)의 딸이다.


(1) 김시민의 출생과 관련된 기록


①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1693년, 숙종19년 간행

: 판관 김시민은 목천(木川)사람인데 무과에 올랐고, 재략이 뛰어났다.

② 충무공시호장(忠武公諡號狀), 1709년, 숙종35년, 영의정 이유 찬

: 공은 가정(嘉靖) 갑인(甲寅)에 목천현 잣밭에서 출생하였다.

③ 대록지(大麓誌), 1776년, 영조52년, 목천현감 안정복 편

: 고적조 - 김시민의 유기(遺基)가 백전에 있다, 인물 충의조 -김시민

④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 1794년, 정조18년, 홍양호 찬

: 김시민은 목천현 사람이다.

⑤ 충무공신도비(忠武公神道碑), 1983년, 권용직 찬

: 가정 갑인 8월에 충청도 목천현 백전촌에서 태어났다.


(2) 김시민의 어린 시절


김시민은 어린 시절부터 언어와 행실, 거동이 다른 아이들과 특이하였다. 머리가 총명하고 기골이 장대하였으며 병정놀이를 좋아하고 언제나 대장이 되어 지휘하기를 좋아하는 등 리더십과 친화력을 일찍부터 지니고 있었다.

사소한 일은 물론 마을의 냇가에 출몰하는 거대한 뱀도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않았던 것이다. 김시민과 관련된 일화가 몇 가지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 이러한 이야기는 김시민의 상무정신과 용맹함을 예견하게 하는 자료들이다.


① 제1화 : 8세 되던 해, 이웃의 아이들과 더불어 길거리에서 병정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마침 천안군수의 행차가 이곳을 지나려 하였다. 수행원이 길을 비키라고 하자 소년 김시민은 큰 소리로 “한 고을 사또가 감히 진중을 통과할 수 있느냐”고 호령을 하면서 조금도 기가 꺾이지 않았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원님은 말에서 내려 어린 소년대장 김시민의 손을 잡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 아이가 누구 집 자제냐?”고 묻자, 옆에 있던 한 아이가 “김지평 영감 댁의 아들입니다“하였다. 당시 아버지 충갑은 서청주 도정촌(현재의 천안시 동남구 수신면 장산리)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로부터 이 말을 들은 군수는 관속들에게 “이 곳을 피해서 가라! 이 아이는 장래가 촉망되는 아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김충갑을 찾아가서는 “10세도 안된 어린아이가 이러한 진을 치고 군율을 엄하게 세우는 것을 보니, 그 의지와 기개가 범상치 않습니다”고 치하하였다.

이처럼 김시민장군의 충의정신은 어린 시절부터 고향인 잣밭에서 싹트고 성숙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② 제2화 : 9세 때의 일이다. 백전 마을 앞에 있는 냇가 큰 바위틈 굴에는 이무기가 살면서 수시로 출몰하여 사람과 가축을 해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 말을 들은 김시민은 그 뱀을 퇴치할 궁리를 하다가 ‘뱀은 뽕나무 활에 쑥대화살로 쏘아 잡는다’는 고사를 읽고 동네 아이들과 함께 냇가로 가서 뱀을 나타나게 유도한 후 손수 만든 활로 쏘아 없애 버렸다고 한다. 지금도 이 마을 어귀에는 400∼500년 된 느티나무와 함께 거북바위가 있는데, 이곳이 바로 김시민이 ‘활로 뱀을 쏘아 죽인 곳’이라는 의미를 지닌 사사처(射蛇處)라 전해 내려오고 있다.


3) 과거급제 및 공직생활


(1) 과거급제


학문보다 병정놀이에 관심이 많았던 김시민은 가문 내 다른 인사들이 유학을 바탕으로 문과에 응시하여 급제의 영광을 누렸던 것에 비해 무과에 응시하여, 25세 되던 1578년(선조11)에 급제하였다. 김시민은 말타기와 활쏘기 등 무사로서의 기량도 뛰어났으나 평소에 학문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아들에 대한 기대가 남달리 크고 교육이 엄격했던 어머니는 문무를 겸비한 김시민이 무과보다는 문과에 급제하는 것을 원했고 무과에 응시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문치주의 조선 사회에서 문과 이외의 등과는 출세에 그다지 배경이 될 수 없었으며, 집안 대대로 무과보다는 문과에 급제한 선조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시민은 많은 고민 끝에 무과를 선택해서 급제한 것이다. 김시민은 세간의 평가나 출세의 조건 등에는 크게 마음을 두지 않았으며 가문의 학풍이나 문신적 성향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2) 공직생활



➀ 훈련원 근무


과거에 급제한 김시민은 훈련원 주부에 제수되었다.

훈련원은 병사의 무재(武才)시험, 무예의 연습, 병서의 강습을 맡아보던 관청으로서 군사상의 중요한 업무를 수행하는 기관이다.

훈련원에 부임한 김시민은 업무파악 과정에서 무기가 녹슬고 군인들의 기강이 해이하여 유사시에 제대로 쓸 만한 병기와 군인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 후 훈련원의 행정실무를 지휘하는 판관이 되자 그동안 근무하면서 훈련원의 존재 이유와 임무 등을 정확히 파악하게 된 그로서는 여간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냥 놔두자니 장래가 걱정되고 시정을 건의하자니 오랫동안 전쟁 한 번 없이 무사 안일한 평화 분위기에 젖어 있던 상부에서 이를 받아드릴지 매우 의문이 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점을 알고 대안을 모색하고자 상부에 시정을 건의하는 것은 공직자의 본분이자 부하된 자의 마땅한 도리라고 판단한 김시민은 어느 날 용기를 내어 국방의 최고책임자인 병조판서를 찾아가 충심으로 시정을 건의하였다.


“소신이 훈련원에 몸담아 보니 군기가 녹슬고 군인의 기강이 해이합니다. 이대로 둘 경우 국가에 변란이라도 생긴다면 속수무책이 될 터이니 대책을 강구하셔야 됩니다.”


그러나 병조판서는 전혀 다른 태도를 보였다.


“지금같이 태평성대에 군기를 보수하고 훈련을 강화하라니 올바른 정신으로 하는 소리인가? 만약 훈련원 군사들을 조련하고 병장기를 만들면 백성들을 두려움 속에 몰아넣는 결과가 될 것이다. 망언이로다.”하면서 오히려 김시민을 질타하였다.


무관과 병사는 전시에 용감하고 지혜롭게 임무를 수행하는 한편 평화로울 때 그 평화를 지키기 위해 더욱 기강을 바로 잡아야 하는 훈련원의 역할을 알지 못하는 소견이었다.


그러나 김시민은 이에 굴하지 않고 재차 시정을 건의하였으나, 병조판서는 평화 시에 분란을 야기시킬 수 있는 철없는 짓을 한다고 심하게 질타하면서

건의를 묵살하였다.


잘못된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 당면한 문제의 해결책을 건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건의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질책과 수모만 당하자 김시민은 과감하게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자신의 힘으로는 바르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무의미하게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헛된 시간을 보내느니 차라리 자신의 의견이 옳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준 것이다. 즉 난국을 타개할 수 있는 분명한 대안이 무엇인지를 강력하게 표명한 것이다.



➁ 니탕개의 난 진압에 참여


훈련원에서 물러난 김시민은 고향인 잣밭으로 내려와 선영이 있는 괴산을 오가면서 여러 해를 불우하게 지냈다. 그러던 중 1583년(선조16)에 니탕개(尼蕩介)의 난이 발발하였다. 육진개척(六鎭開拓) 이래 동북(東北)방면의 여진족에 대한 경략은 한동안 잘되어 왔었으나, 중종 이후로 내정(內政)이 문란하여짐에 따라 북방에 대한 통제력도 차츰 약화되었는데, 선조 때에 이르러서는 이들 호인들의 움직임이 더욱 활발해지고 미묘하였으니, 회령의 니탕개의 난이 그것이다. 니탕개는 조선에 귀화한 여진인(女眞人)으로 변방 6진에 출입하면서 조정으로부터 관록과 후대를 받아온 인물이다.


그러나 경원성(慶源城)에 사는 여진인들이 전(前) 진장(鎭將)의 허물을 이유로 각가지 말을 퍼뜨려서 민심을 선동, 난을 일으켰다. 니탕개도 이에 호응하여 조정에 반기를 들었다. 처음 경원부사(慶源府使) 김수(金璲)가 적군(賊軍)에게 패하자, 여진인들은 부성(府城)을 점령하여 약탈하고, 그 후 부내(府內)의 모든 진보(鎭堡)를 점령하였고 기세가 대단하였다.


이 난은 국가적으로는 위기였으나 김시민 개인에게는 도약의 기회로 작용한 사건이었다. 병조판서와의 갈등 이후 고향에 칩거하면서 새로운 도약을 도모하고 있던 그에게는 새로운 기회였던 것이다.


니탕개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조정에서는 우참찬 겸 황해도 도순찰사였던 정언신(鄭彦信, 1527∼1591)을 진압책임자로 임명하였다. 정언신은 이순신 · 신립 · 이억기 · 김시민 · 원균 등 당시 쟁쟁한 무관들을 막하 장수로 삼고 출정하여 적군을 강 너머로 추격하여 호적(胡賊)의 소굴을 소탕하는 등 반란을 진압하였다.


이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운 김시민은 다시 벼슬길에 나갈 수 있게 되었고, 사직당시의 벼슬인 종5품직 군기시 판관에 제수되었다. 훈련원 판관시절 병조판서와의 의견대립으로 사직했던 그에게 새로운 길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관료사회의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에 막혀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하고 관직을 버렸으나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열정과 뜻을 버리지 않고 위기를 기회로 생각하면서 끝까지 기회를 도모하는 자는 소망하는 바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사례이다.


➂ 진주판관에 부임


당파의 이해관계를 넘어 재능 있는 장수로 인정받고 천거된 김시민은 임진왜란 발발 전해인 1591년에 진주판관(종5품의 중급벼슬)으로 부임하여 진주목사를 보좌하고 행정실무를 지휘·담당하면서 군정 등에 참여하였다. 니탕개의 난 진압 이후 재도약의 기회를 잡은 그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된 것이다. 당리당략에 좌우되어 무차별적으로 상대 당인을 공격하던 그 시절에 당파를 초월하여 천거되었다는 사실은 그의 능력과 재주가 남다르게 높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사적인 이익과 욕심보다는 공적인 것을 먼저 추구하는 인재는 어느 시대 어떤 상황에서나 인정을 받게 마련인 것이다.


그런데 김시민은 자신의 부임 일정을 집에도 알리지 않았다. 그의 행차가 고향인 잣밭마을 앞을 지나게 되었을 때 구경꾼들이 몰려들어 시끄러워졌다. 이 소란에 밖으로 나와 그 광경을 담장 너머로 쳐다보던 어머니가 “도대체 누구 행차인데 이리도 소란스러운가?”라고 사람들에게 묻자 “바로 부인의 자제께서 진주판관이 되어 부임하는 길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를 듣고 어머니는 내심 놀랍고도 자랑스러웠다. 일찍이 어머니는 “문관의 집에서 무과에 오를 것이냐?”라고 하면서, 김시민의 무과급제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아들의 장도를 축하하면서 그의 곧은 선택을 인정하였다.


그가 부임한 진주는 상주·성주와 더불어 정3품의 목사가 파견되는 지정학적 요충지였다. 더군다나 본래부터 호족이 많아서 다스리기 어려운 곳이었다. 오랫동안 향촌에서 뿌리를 내리고 세를 넓히며 영향력을 행사해온 호족들은 길지 않은 기간 동안 근무하다 근무지를 바꾸고 돌아가는 파견관리들을 자신의 세력으로 조종하려 들었으며, 이에 응하지 않거나 새로운 개혁을 시도할 경우에는 조직적으로 대응하며 맞섰다. 따라서 새로 부임한 수령에 대한 기득권층의 조직적인 반발은 예측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김시민은 기득권 세력의 조직적인 반발과 저항에도 원칙을 무너뜨리거나 그들의 부정한 요구에 양보하거나 타협하지 않았다. 수령인 목사를 도와 공직수행의 공명정대함이 대나무처럼 곧았고, 덕의(德義)를 베풀어 위엄을 세우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이에 휘하의 장병과 관속 및 백성들이 모두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진주판관에 부임한 이후 행정을 공명 정대하게 수행함에 따라 관리들은 두려움 속에 감복하였으며, 덕과 의로써 백성을 다스려 군민화합을 이루어 냈던 것이다. 이것이 바탕이 되어 훗날 진주성 전투에서 군관민 통합에 의한 대승을 거두는데 큰 보탬이 되었을 것이다.


➃ 진주목사에 제수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당파싸움에만 매달려 전쟁준비를 소홀히 한 조선군은 육전에서 연이어 패배하였다. 음력 4월 13일(양력 5월 23일)에 병선 700여척에 나누어 타고 오전 8시 오우라항을 떠나 오후 5시에 부산 앞바다에 도착한 왜군은 그날로 부산포에 상륙하여, 파죽지세로 조선군을 격파하였다. 4월 24일에 이일장군을 경상북도 상주에서, 4월 28일 신립장군을 충주 탄금대에서 무찌르고, 20일 만인 5월 2일에 마침내 한성을 점령하였다. 연이어 6월 14일에는 평양을 함락시켰다. 불과 두 달만의 일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얼마 후 신병으로 일시 지리산으로 피신했던 목사 이경이 병사하자 김시민은 초유사 김성일의 명에 의해 진주목사대행을 제수 받게 되었다. 하늘이 영민하고 용감한 김시민을 일으켜 세운 것이다.


미처 대비하지도 못한 전투 상황에서도 김시민은 침착함을 잃지 않고, 먼저 성 주민을 안전하게 돌보고 민심을 안정시키고 피난갔던 사람들을 돌아오게 하였다. 선조수정실록(권26)에서도 그의 목사 임명에 대해서 “판관 김시민을 발탁하여 진주목사로 삼았다. 김시민이 진주의 주민을 안정시키면서 전쟁에 나가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으므로 금산(金山) 이하에 머물며 주둔하던 적이 모두 도망하였다. 이에 김시민이 도로 진주에 주둔하면서 굳게 지킬 계획을 세웠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의 능력이 크게 인정받은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성을 지키기 위해서 무너진 곳을 수축하고 무기를 정비하는 한편, 군사의 양성에도 진력하였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최대한 이용하여 매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러한 전투의 승리가 인정되어 7월 말에 정식 진주목사로 승진할 수 있었다. 9월 초순에는 진해의 왜장 평소태(平小泰)를 사로잡아 몽진 중인 선조에게 압송하는 전과로 비변사의 장계에 의하여 통정대부가 되었으며, 10월에는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승진하였다.


몇 달 후 왜군은 김시민목사의 전쟁 대비책이 착실하게 진행되고 있었음에도 정보의 부족으로 진주성의 수비가 허술할 것으로 판단하고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다. 왜군의 입장에서는 영호남을 잇는 전략적 요충지였던 진주의 확보가 전쟁의 승기를 잡는 가장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4) 유허지


김시민과 직접 관련되어 현재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는 천안 소재 유허지로는 생가터, 사사처가 있고, 기타 연관된 곳으로는 도정강사(桃汀講舍), 충렬사지(忠烈祠址) 등이 있다.

또한 충북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에는 묘소가 있는 충민사(忠愍祠)와 그 옆의 충렬사(忠烈祠)가 있어 매년 음력 9월 초정일(初丁日)에 괴산군에서 추모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또한 승첩지인 경남 진주시에는 진주성이 있고, 그곳에는 김시민장군 동상과 매년 음력 3월 초정일에 진주시에서 제향을 올리는 창렬사(彰烈祠)를 비롯하여 많은 유적들이 있다.

여기서는 천안에 소재하고 있으며 김시민장군과 직접 관계가 있는 생가터와 사사처만을 소개한다.


(1) 생가터


생가터는 충무공 김시민장군이 태어난 곳이다. 현재의 충남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가전리 460-1번지 대지로서 당시에는 충청도 목천현 백전동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많이 흘러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이 없어 생가터의 실체를 확인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러던 중 충청남도 문화재위원회는 여러 고증자료와 전문가들의 현지조사 및 전해 내려오는 일화 등을 토대로 이곳을 김시민장군의 생가터로 확정 짓고 인접한 사사처와 함께 2004. 4. 10 충청남도기념물 제166호로 지정, 고시하였다.

김시민장군의 유허지로 지정된 생가터는 면적이 1,583㎡(478.9평)로서 안동김씨 학암종중이 소유하고 있던 부지를 2008년도에 천안시가 국비 3억원과 시비를 들여 매입한 후 지장물 철거 및 평탄작업 등을 거쳐, 2010. 10 생가터 표지석을 세워놓은 공지이다. 향후 김시민장군의 유허지 정비사업이 본격 전개될 경우 생가지 복원의 중심장소가 될 것으로 보인다.

(2) 사사처(射蛇處)


사사처는 생가터와 함께 충청남도기념물 제166호로 지정된 충무공 김시민장군의 유허지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유적이다. 충남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가전리 471-1번지 임야(136㎡) 및 472-2번지 도로(46㎡)로서 총면적이 182㎡(55.1평)인 천안시 소유지이다.

사사처는 충무공 김시민 장군이 9세 때에 활을 쏘아 이무기를 잡았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 잣밭마을 어귀에 있는 곳으로서 이름도 장군의 상무정신과 용맹함을 기념하기 위해 ‘활로 뱀을 쏘아 죽였다’는 의미의 사사처라고 지어졌다.

이곳에는 ‘김씨세거 백전동천’(金氏世居 栢田洞天)이라는 글자가 바위 후면에 새겨진 거북바위와 수백 년 된 느티나무 한그루 그리고 1988년에 충무공김시민장군기념사업회가 건립한 충무공김시민장군유적비인 사사처비가 있다. 또한 바로 옆에는 김시민장군의 유허지가 충청남도 문화재로 지정된 것을 축하하고 장군의 업적을 오래도록 기리기 위해 2004. 9월에 충무공김시민장군기념사업회가 국민성금과 천안시보조금으로 건립한 충무공김시민장군유허비가 있다. 또한 독립기념관에는 김시민장군어록비가 세워져 있다.



2. 김득신


1) 출생 및 성장과정


김득신(金得臣, 1604∼1684)은 1604년(선조 37년) 10월 18일에 태어났다. 조선중기에 활동했던 시인이자 시론가로 충무공 김시민 장군의 손자이자 경상감사(慶尙監司) 안흥군(安興君) 김치(金緻)의 아들이다.


김득신은 자가 자공(子公), 호는 백곡(栢谷) 또는 귀석산인(龜石山人), 본관은 안동이다. 김득신의 모친은 사천목씨(泗川睦氏) 두일당 첨(逗日堂 瞻)의 딸이다. 김득신은 경주김씨 장령(掌令) 성발(聲發)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기묘명현의 한 사람인 김정(金淨)의 현손이다. 김득신은 경주김씨와의 사이에 3남 2녀를 두었고, 다시 이계도(李繼道)의 딸을 맞아 5남 1녀를 두었다.


김득신의 출생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으나 그의 부친이 그가 출생하기 3년 전인 1601년부터 4년간 괴산의 능촌리 방하현(方下峴)에 머물고 있었다는 것과 김득신이 어려서 청안 삼성당(현재의 증평읍 내성동)에 살면서 공부하였다는 집안의 증언으로 보아 증평이나 괴산 능촌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김득신의 호의 하나인 백곡(栢谷)은 할아버지 김시민장군의 출생지인 목천현 백전동(栢田洞, 현재의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가전리 잣밭)에서 따온 것이고, 귀석산인(龜石山人)은 청안현(淸安縣, 현재의 증평) 좌구산(坐龜山) 아래의 귀석산(龜石山)에서 따온 것인데 이곳은 그의 선친 때부터 세거지(世居地)이다.

김득신은 어릴 때 천연두를 앓아 노둔한 편이었으나, 아버지의 가르침과 훈도로 서서히 문명(文名)을 떨쳤다. 아버지로 부터 사략(史略)을 배우는데 이해를 하기는커녕 읽기조차 못하여 이를 옆에서 지켜보던 외숙이 공부시키는 것을 단념하라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본래 역학에 해박하고 인간의 운명을 논하는데 조예가 깊어 아들인 득신의 운명이 문요성(文曜星)을 띠고 있어 언제일지 모르나 후일에는 큰 문장가가 될 것임을 믿고 열심히 가르쳤다.


백곡이 태어날 때 그의 아버지 김치는 꿈에 노자를 만났고 그 연유로 아이적 이름을 몽담(夢聃)으로 지었다. 그런데 신몽을 꾸고 태어난 아이답지 않게 머리가 좋지 않았다. 10살에 비로소 글을 배우기 시작했고 흔히 읽던 첫 단락은 26자에 불과했지만 사흘을 배우고도 구두점조차 끊어 읽지 못했다.


그러나 득신은 주야로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으며 열심히 책을 읽어 책읽기에 재미를 붙이게 되었고, 옛 문장을 만 편 읽기로 결심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백이전(伯夷傳)은 매우 좋아하여 수없이 읽었으며 물경 1억1만3천 번을 읽었다고 전해온다. 이처럼 그는 쉽게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엄청난 노력가로 끝내 최고의 문객 지위에 올랐다.


그가 독서하던 서창(書窓)을 ‘수없이 반복하여 독서하던 곳’이라 하여 억만재(億萬齋)라 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그의 문명이 날리게 된 것은 당대 일류 문장가인 택당(澤堂) 이식(李植)을 만난 후였다. 시에 능해 오언 · 칠언절구를 잘 지었다. 이식은 글을 배우러 온 김득신에게 “그 명성을 익히 들었는데 이제 시문을 보니 당대 제일”이라 하였다 하고, 또 외숙 목서흠이 이식에게 당시 최고의 문사를 물었더니 “김득신의 시가 제일”이라 하였다는 말이 전해져 오고 있다.


2) 활동사항


(1) 이렇게 지독스레 열심히 공부한 득신은 늦은 나이인 1642년(인조20) 39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1662년(현종3) 59세에는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성균관학(成均館學), 장악원 정지제교(掌樂院 正·知製敎), 통훈대부(通訓大夫) 행성균관전적(行成均館典籍) 겸 중학교수(中學敎授)를 지냈다. 1663년(현종4년, 60세)에 병조, 공조, 예조의 좌랑(佐郞)을 거쳐 이후 성균관(成均館) 직강(直講), 제용감정(濟用監正). 사복시정(司僕寺正), 풍기군수(豊基郡守), 사헌부 장령(司憲府 掌令), 어모장군 행용양위부호군(禦侮將軍 行龍驤衛副護軍), 사도시정(司導寺正), 사도시정 겸 증광시 시험관, 승문원 판교(承文院 判校), 강원도사(江原都事), 홍천군수(洪川郡守), 정선군수(旌善군수) 등을 지냈다.


사헌부 장령이 되었을 때의 일이다. 그가 교리(敎理) 옥당(玉堂)은 무난히 감당할 수 있어도 사헌부 장령은 적성에 맞지 않는 직책이었다고 보여 진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여러 번 김득신이 장령에 합당치 않은 인물이라고 체직을 요구하는 간언이 있었다고 기록되었다.


그는 한직인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를 최후로 벼슬을 그만두고 강호에 낙척하여 시로써 세월을 보냈다.

1684년(숙종10) 81세가 되던 해 가을 8월 29일에 생을 마쳤다.

그는 조부 김충무공의 공훈으로 안풍군(安豊君)으로 습봉되는 영에를 얻었으며, 안동김문에 4대 봉군이 되어 유례가 드문 가문의 영예를 누리었다.

※4대 봉군 : 김충갑-상락군, 김시민-상락부원군, 김치-안흥군, 김득신-안풍군


(2) 문집으로 백곡집(栢谷集)이 있고, 시화집인 종남총지(終南叢志)와 평론집인 종남쇄언(終南粹言) 등이 있다. 그 밖의 작품으로 술과 부채를 의인화한 가전소설 〈환백장군전(歡伯將軍傳)〉과 〈청풍선생전(淸風先生傳)〉을 남기기도 했다. 이것은 ‘국순전’ ‘국선생전’ 등 고려시대에만 한정된 줄 알았던 가전체(假傳體)계통의 소설이 조선조에도 지속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중요한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처럼 그는 한국의 한시사(漢詩史)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김득신은 80이 넘도록 장수하면서 괴산, 증평, 목천 등 각지를 오가며 벗들과 시로서 대화하면서 모든 번민을 잊기도 하고, 자기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박장원(朴長遠), 정두경(鄭斗卿)을 비롯한 당대의 문사들과 언제나 시로서 이야기 할 수 있었다. 청주에 거주하던 문우 홍석기(洪錫箕)를 찾아 시주로서 울분을 달래기도 하였다. 그는 언제나 귀석산 아래의 고향을 생각했고 괴산의 골짜기를 노래했다. 이렇게 청풍명월의 고장은 언제나 그의 시의 소재였다.


현재 그가 지은 수많은 한시(漢詩)들을 모아 놓은 백곡집(栢谷集)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시집에는 고향인 괴산과 증평을 읊은 시와 청주와 금강 그리고 당시 청주목에 속했던 할아버지 김시민의 고향인 목천과 병천을 읊은 시들이 많이 들어 있다. 또한 충청도와 관계있는 문우들과 관련된 시들도 있다.

백곡이 산수를 찾아 시와 문장을 지은 수많은 일화가 후세에 전한다. 그는 방랑하는 시인 문장가였으나, 후세의 김삿갓 김병연(金炳淵)처럼 실의의 시인이 아니요, 벼슬을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처지였으나 김득신은 산수가 좋아서 산수간에 오유하였으며, 글이 좋아서 억만 번 읽었으며, 삼라만상의 오묘한 진리를 시로 표현해 보려고 노력하였다.


그가 지은 시 가운데 가장 수작으로 꼽히는「용호한강시(龍湖漢江詩)」라는 시 한절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고목한운리(古木寒雲裏) 찬 구름 속의 고목

추산백우변(秋山白雨邊) 소나기 내리는 가을 산

모강풍랑기(暮江風浪起) 저물녘 강에 풍랑이 일어

어자급회선(漁子急回船) 어부가 급히 배를 돌리네


한 폭의 그림을 그려 놓은 그의 대표시이다. 그를 노둔한 사람이라고 하기도 했지만 천생의 시심이 없으면 이와 같은 시중유화(市中有畵)가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의 뛰어난 문장이 세상에 알려지니 효종은 이 시를 보고 당시(唐詩)에 넣어도 부끄럽지 않다고 감탄했으며, 택당 이식은 당대 제일의 시인은 김득신이라고 칭찬하였다. 백곡의 시문은 중국에도 전해져 칭송리에 회자 되었다고 한다.


3) 유적지


김득신과 관련된 유적지는 그의 활동상에 비해 그리 많지 않다. 그는 시인이자 문장가로서 정자, 사당 등 여러 곳에 글을 짓거나 썼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 이들을 종합적으로 발굴, 정리한 자료는 없다. 따라서 여기서는 실체가 확인된 현존하는 유적지만을 소개하고자 한다.


(1) 취묵당(醉墨堂)


취묵당은 충북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산 4번지에 소재하고 있으며, 500여m 떨어진 곳에 그의 할아버지 충무공 김시민장군의 묘소가 있는 충민사가 있다. 2007년에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61호로 지정되었다.. 1662년(현종3)에 김득신이 만년에 세운 독서재(讀書齋)이다. 팔작지붕에 목조 기와집으로 내면은 통간 마루를 깔고 난간을 둘렀다. 비교적 보존상태가 양호하며 괴강의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더불어 정자건축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김득신이 이곳에서 「史記(사기)」「伯夷傳(백이전)」을 1억 1만 3천 번을 읽었다고 하여 일명 억만재(億萬齋)로도 불린다.


(2) 묘소


김득신의 묘소는 충북 증평군 증평읍 율리 산 8-1번지에 소재하고 있으며, 2004년에 증평군 향토유적 제6호로 지정되었다. 묘소에는 비문과 동자석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아버지 김치의 묘아래 안치되어 있다. 그는 스스로 지은 묘지명에서 이렇게 썼다. “재주가 남만 못하다고 스스로 한계를 짓지 말라. 나보다 미련하고 둔한 사람도 없겠지 만은 결국에는 이룸이 있었다. 모든 것은 힘쓰는 데 달려 있을 따름이다.”


(3) 복구정(伏龜亭)


충청남도 천안시의 동남구 북면 연춘리에 있는 옛 정자이다. 거북이가 엎드려 있는 것처럼 되어 있는 큰 바위 위에 정자를 지었으므로 복구정(伏龜亭)이라 하였다. 원래의 정자는 조선 선조 때 세웠는데, 풍치가 뛰어난 곳으로 김득신은 이곳을 찾아 벗들과 함께 즐겨 시를 지었으며 ‘구정문적(龜亭聞笛,구정에서 피리소리를 듣고)’ 등의 시를 남겼다. 또한 복구정은 영조 때 문장 석북(石北) 신광수(申光洙) 등 여러 선비들이 늘 이곳에 모여서 시를 지으며 놀았다. 그 후 정자는 큰 장마로 없어졌다가 1964년에 다시 세워졌다. 정자 바위 옆면에 숙종 때 학자 타우(打愚) 이상(李翔)의 시가 새겨져 있다.



3. 진주대첩


1) 개요


진주대첩은 임진왜란 기간 중 조선군이 단일전투에서 거둔 최대의 승첩이다. 전투는 1592년 음력 10월 5일부터 10월 10일까지 5박 6일간 치러졌다. 진주대첩은 의복 및 식량을 호남에서 현지 조달, 장기전을 준비하려던 왜군의 기도를 여지없이 좌절시켰다. 이로 인해 왜군으로 하여금 전쟁을 조기에 종식시키기 위한 강화교섭을 서두르게 되는 단초를 제공하였으며, 전후 복구

때 나라에 큰 보탬이 되었다. 특히 3,800명의 적은 군사로 당시 신식무기인 조총으로 무장한 정예왜병 3만 명과 싸워 그 중 2만 명을 사상시키는 큰 전과를 거둠으로서 조선군과 의병들로 하여금 왜군과 싸워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용기를 갖게 해주었다. 진주대첩은 이순신의 한산도대첩, 권율의 행주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일본사에는 임진왜란 기간 중 가장 치욕적인 패배로 기록되어 있다 한다.


2) 김시민의 활약상


(1) 김시민의 전략전술


김시민은 소수의 병력으로 대병을 맞아 필승하기 위해 다양한 전술을 구사하였다. 성 밖에 있는 의병들로 하여금 산발적인 적 측후방 공격 및 교란작전과 횃불시위 등을 전개하여 아군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적군의 혼란을 유도하였다. 또한 성안의 노약자와 부녀자에게 남장을 하여 군사가 많아 보이게 하였고, 야간에 악공으로 하여금 피리를 불게 하여 왜군의 심리를 교란시켰다.


그리고 차대전, 현자총통, 질려포, 화약 등 당시 조선의 신식무기들을 적절히 활용하여 왜군의 다양한 공격을 효과적으로 저지하였다.


특히 김시민은 왜군이 진주성을 공격할 것이라고 예상하여 평소 전투에 대한 대비태세를 강화하였다. 염초 150근과 총통 70여 자루를 만들었으며, 재능이 있는 자를 골라 총 쏘기 연습을 시켰고, 화약을 짚으로 싸서 던지고 물을 끓여 적에게 붓는 등 가용한 모든 전략전술을 강구하였다.


김시민은 진주성 전투에 대비하여 가능한 모든 범위 내에서 다양한 무기체계를 준비하고 군사들을 훈련시켰으며, 팔진도법(八陣圖法)이라는 새로운 전법을 구사하였고, 전투 중에는 열악한 전투력을 심리전 등을 이용하여 극복하였다.


한편, 진주성의 둘레는 1만여 척으로 수성에 필요한 최소한의 병력은 1만여 명이었다. 그러나 당시 수성군은 3,800명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김시민은 노약자와 여자까지 동원하여 남장을 시켜서 성벽에 배치하였다.


또한 병력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하여 허수아비와 같은 의병(擬兵)을 세워 병사를 많아 보이게 하는 위장술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은 김시민의 기만작전에 넘어간 왜군은 공성전을 장기전이 아닌 단기전으로 결정하였고, 여섯 개 진영으로 나누어 주야로 공격하였다. 이미 노현전투와 창원전투에 이어 함안성 전투와 진주 외곽전투에서 하루 이틀 사이에 승리한 경험이 있던 왜군은 진주성 전투에 대해서도 막연한 승리감에 도취된 상태로 공격하였다.


그러나 김시민은 왜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나름대로 충분한 준비를 하였다.

왜군은 대병력과 우세한 화력을 바탕으로 주야간에 성을 공격하여 단기간에 함락시킬 것으로 예상했으나, 철저한 준비를 바탕으로 김시민은 이에 말려들지 않고 다양한 작전으로 수성전을 수행하였다. 절제되고 통제된 명령을 바탕으로 최 근접거리에서만 화살, 총포 등 병기의 사용을 집중시킴으로써 병력과 무기의 열세를 극복하였다. 즉 수성군 중 적과 전투경험이 있는 주력군을 취약지점인 동쪽방면에 배치하여 수비토록 하였고, 노약자들은 후방에서 지원하도록 하였다.


(2) 전투의 승리요인


진주전투를 승리로 이끈 요인은 무엇보다도 김시민장군의 철저한 전투준비와 합리적인 전쟁수행 능력 그리고 살신성인의 충의정신이라고 볼 수 있다.

김시민장군은 지휘관으로서의 자질과 능력도 뛰어났지만 자신보다는 국가를 먼저 생각하는 투철한 애국심과 충성심이 절대 열세인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큰 힘이 되었다고 보여 진다. 이를 몇 가지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자신과 가족보다 국가와 민족을 먼저 생각했던 김시민의 충절정신이다. 활을 당겨 다섯 손가락 모두가 못쓰게 될 때까지 싸우겠다고 하는 결연한 책임감과 충성심이다. 이러한 불굴의 정신은 부하장병과 성안의 민간인까지 혼연일체의 저항정신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다. 수적으로 열세였으나 일당백 하겠다는 결의를 다질 수 있었던 것도 지휘관의 충의에서 비롯되었음은 물론이다. 의(義)로써 줄기를 삼고 충(忠)으로써 뿌리를 삼고 살았던 김시민장군의 의지가 진주성에서 그대로 발현된 것이다.


둘째, 김시민의 철저한 전투준비태세와 병사들과 함께 생사고락을 함께 한다는 실천궁행의 태도를 몸으로 보여주었던 실천성이다. 그는 부인과 더불어

먹을 것을 가지고 성을 돌아다니며 군사들에게 먹였으며, 자신이 직접 주야로 분투함으로써 모두를 감격시켰다. 이를 통하여 임전무퇴 · 백전불굴의 정신이 고양되었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장수의 솔선수범은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켰으며, 전투력의 극대화를 도모할 수 있었다. 이는 전투에서 상대방을 압도하는 정신으로 발양되었던 것이다.


셋째, 진주성의 자연지리적 조건이다. 진주성은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추었고, 성 축조 시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남으로는 남강, 서로는 깎아지른 절벽이 있었다. 따라서 이 방면으로의 침투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것이다. 동과 북은 평지였으나 성 주위에 연못(해자)를 만들어 적군의 침투에 대비함으로써 공격자체를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넷째, 고도의 심리전을 통하여 왜군을 무력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왜군과의 심리전에서도 뒤지지 않았던 전략상의 승리였다. 활 쏘는 모습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성위에 배치하였으며, 성안의 한가로움을 보일 목적과 충분한 준비가 되어있다는 시위의 방편으로 악공을 동원하여 야간에 문루위에서 악기를 연주하게 하였다. 전력면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여성들에게 남장을 하도록 함으로써 적의 사기를 꺾었다. 특히 왜군에 포로로 잡혀 있던 어린아이가 도망쳐 왔을 때 이들에게 적의 동향을 미리 확인하고 대응책을 면밀하게 준비함으로써 수적으로나 전력면에서 막강했던 적의 예봉을 꺾을 수 있었다.


다섯째, 민·관·군의 합심이다. 민·관·군이 혼연일체가 되어 준비한 전투는 침략군의 막강한 화력과 8배에 가까운 군사가 공격해 와도 능히 막아내고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진주성을 중심으로 북쪽에서는 곽재우와 심대승, 서북쪽에서는 최경회와 김준민, 임계영이, 서쪽에서는 정기룡, 조경향이, 남강으로는 하경해가 그리고 남쪽에서는 정유경, 이달, 최강, 조응도 등 의병 및 관군 등이 협공에 나선 것도 승리의 요인이 되었다.


결론적으로 김시민이 주도한 1차 진주성전투는 아군의 대승이었으며 왜군에게는 가장 치욕스러운 전투로 기록된 완전한 패배였다. 진주대첩은 총지휘관인 김시민과 군·관·민 그리고 성 밖의 의병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거둔 승리였다. 진주성전투의 승리는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미리 계획하고 준비하여 실전에서 이를 응용한 김시민장군의 지휘능력과 자신의 가족보다 국가를 먼저 생각하는 충의정신과 명령에 따라 목숨을 버릴 각오로 지휘관을 따른 병사 그리고 진주성민이 공동으로 만들어 낸 결과라고 할 것이다.



3) 진주대첩의 역사적 의미


진주성전투는 임진왜란 기간 중 조선군이 단일전투에서 거둔 최초최대의 승첩이었고,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교두보에 위치한 성을 온전히 보전한 전투였다. 이와 함께 일본에는 진주성이 조선 제일의 성이라는 이미지로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진주성전투의 역사적 의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막강한 군사력과 무기를 가지고 쳐들어 온 왜군을 막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과 사기고양이다. 민족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살신성인의 정신력은 왜군의 침략을 막아낼 수 있었고, 적군에게는 전쟁의지를 꺾는 효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아무리 강한 적이라 하더라도 민·관·군이 애국정신으로 굳게 뭉쳐 필사즉생의 각오로 싸운다면 능히 물리칠 수 있다는 귀중한 교훈을 남김으로써 그 후 전국적으로 의병과 승병들이 크게 궐기하는 단초를 제공하였다.


둘째, 조선군의 전투역량이 제고될 수 있었음은 물론, 군사와 군량의 보전과 함께 병력충원 및 사기제고에 크게 기여하였다.


셋째, 호남지방의 곡창지대를 온전하게 보존함으로써 일본의 보급기지화를 막았고, 상대적으로 조선의 군사력을 증대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전후 복구에 소요되는 식량 및 의복 등의 물자조달에 많은 기여를 하였으며, 호남지역에 산재한 수많은 문화재와 귀중한 도서들을 보존케 하였다.


넷째, 경상우도 각 고을의 안정적인 보존을 가능케 하였고, 호남으로 통하는 길을 막아 왜군의 서남부지역 진출을 차단시켰다. 즉 왜군의 배후지를 장악하여 진격과 보급품 조달계획에 중대한 차질을 초래하는 계기가 되었다. 왜군으로 하여금 배후에 강력한 적이 있어 언제든지 공격을 당할 수 있다는 위기감을 심어줌으로써 더 이상 전장을 확대하지 못하고 병력을 붙들어 매놓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결국 왜군이 평양과 함경도 등 조선 땅 대부분을 점령하고도 전세를 성공적으로 이끌 수 없게 했던 요인의 하나는 진주성을 공략하고 호남을 점령하려고 했던 계획이 좌절되었기 때문이다.


다섯째, 왜로 하여금 강화교섭을 서두르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이순신에 의한 바닷길의 차단과 김시민에 의한 육로의 차단 그리고 명나라 군대의 파병 및 전국각지에서 들불처럼 일어나는 의병의 궐기 등으로 장기전에 의한 조선공략은 불가능하다는 인식을 왜군 수뇌부가 갖게 되었다. 이로 인해 철군을 위한 강화교섭에 적극 나서게 되었다.


4) 조정의 포상과 추모행사


(1) 조정의 포상


김시민은 전투가 거의 끝나갈 무렵인 10월 10일 여명에 성안을 순시하던 중 시신 틈에 숨어있던 왜군저격수의 총탄을 왼쪽 이마에 맞고 쓰러졌다. 그 후 치료를 받다가 1592년 음력 10월 18일 39세를 일기로 장렬히 순국하였다.

조정에서는 1604년(선조37) 6월 25일에 김시민을 선무공신 2등과 상락군에 봉하였으며, 10월 29일에는 장군의 영정을 그려 후세에 전하게 하였다. 관작과 품계를 2등급 올려 영원히 사유의 은전을 받도록 하였고, 반당 6명, 노비 9명, 구사 4명, 전지 80결, 은자 7냥, 내구마 1필을 하사하였다.

또한 1709년(숙종35) 6월 16일에는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추봉하고,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하는 한편, 1711년(숙종37)에는 충무공의 시호를 하사하였다.

1735년(영조11년) 2월 14일에는 박문수어사의 진언에 따라 동래부사 송상헌의 사당에서 김시민장군을 우선 함께 치제(致祭)하도록 하였다.


(2) 추모행사


김시민장군의 추모행사는 과거 진주 · 천안 · 괴산 등지에서 행해졌으나, 1868년(고종5년) 9월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각지의 사당이 훼철된 후 잠시 중단되었다가 그 후 부분적으로 부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남 진주에서는 진주성내에 있던 김시민장군의 추모사당인 충민사(忠愍祠)가 훼철된 후 아직까지 복구되지 않은 상태에서 인근 창렬사(彰烈祠)에 위패를 모시고, 김천일 · 황진 등 제1 · 2차 진주성전투에서 싸우다 순직한 38명의 호국영령들과 함께 매년 음력 3월 초정일(初丁日)에 진주시 주관아래 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또한 충북 괴산에서는 1979년 국고지원 및 안동김씨 문중의 부지기증으로

김시민장군의 묘소가 있는 괴산읍 능촌리에 충민사(忠愍祠)를 짓고 그곳에 영정과 위패를 모시고, 매년 음력 9월 초정일에 괴산군 책임아래 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그러나 출생지인 천안에는 과거 김시민장군을 비롯하여 아버지 김충갑, 숙부 김제갑 등을 함께 모셨던 충렬사(忠烈祠)가 훼철된 이후 지금까지 추모사당 및 생가 복원이 되지 않아 김시민장군을 추모할 수 있는 곳이 전혀 없는 상태이다. 다만 2000년 7월 19일에 설립된 민간단체인 사단법인 충무공김시민장군기념사업회가 2000. 9. 22 이후 매년 장군의 탄신일인 양력 9월 23일에 탄신기념행사를 개최하는 등 추모행사의 명맥을 겨우 이어가고 있을 뿐이다. 주무기관인 천안시, 충남도 등 지자체나 정부의 무관심 속에 조국을 누란의 위기에서 구한 영웅의 혼이 의미 없이 묻혀 지고 있는 것 같아 많은 이들의 안타까움을 사고 있다.

기사입력: 2015/01/19 [09:39]  최종편집: ⓒ 천안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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