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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20.11.26 [20:32]
<특별기고> 봉오동전투 승전 100주년의 역사적 의의와 과제
 
황선영


 2010년 10월 7일은 봉오동전투 100주년이 되는 매우 뜻 깊은 날이다. 봉오동 전투(鳳梧洞戰鬪)는 1920년 6월 6일-6월 7일 만주에 주둔 중이던 홍범도(洪範圖), 최진동(崔振東, 일명 최명록(崔明錄), 안무(安武) 등이 이끄는 대한군북로독군부의 독립군 연합부대와 신민단 예하 이흥수(李興秀), 한경세(韓景世)의 신민단 독립군 1개 중대가 연합한 한국인 독립군 1,200여 명이 중국 지린성(吉林省) 허룽현(和龍縣) 봉오동에서 일본군 제19사단의 야스카와 지로(安川二郞)가 이끄는 월강추격대대와 니히미 지로(新美二郞)가 이끄는 남양수비대 예하 1개 중대 병력 500여 명과 싸운 전투를 말한다.
  상해임시정부의 발표에 의하면, 봉오동전투에서 일본군 측 피해는 전사자 157명 · 중상 200명 · 경상 100명이고, 한국인 독립군 측 피해는 전사자 4 · 중상 2명에 불과해 한국인 독립군이 대승을 거두었다고 한다.


  봉오동 전투에서 한국인 독립군이 대승을 거둔 요인은 일본군 제19사단의 작전 실패로 일본군이 서로 총을 겨누고 발사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벌어지고, 한국인 독립군이 봉오동의 험준한 골짜기 지형과 기후 조건을 잘 이용해서 일본군을 봉오동 골짜기로 유인해 선제 총공격을 감행해 일시에 일본군을 섬멸했기 때문이다. 
  봉오동전투는 3·1운동 직후 만주에서 집결한 독립운동 세력이 '독립전쟁의 해'를 선포하고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벌여 사실상 첫 대승을 거두어 한국인 독립군의 사기를 크게 올리고 병력보강과 군비확충에 활력을 주어 청산리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     ©편집부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의 영웅 여천 홍범도 장군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의 영웅 여천(汝千) 홍범도(洪範圖, 1868-1943) 장군은 1868년 8월 27일 평안북도 자성<慈城:일설에는 평안북도 양덕(陽德) 또는 평양이라고도 함>의 남양홍씨 가문에서 가난한 농부 홍윤식(洪允植)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난 지 7일 만에 어머니가 출산 후유증으로 사망하여 동네 부인네들로부터 젖을 얻어먹으며 자랐고, 또 9살 되던 해에는 부친마저 병으로 세상을 떠나 고아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정규교육도 받지 못하고 머슴, 평양감영 나팔수, 제지소 노동자, 금강산 신계사 지담대사 상좌승, 소작농, 포수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의병과 독립군이 되어 국내외에서 수많은 항일무장독립투쟁을 전개하여 우리 조국 대한민국이 일제로부터 독립을 하는 데에 많은 공헌을 했다. 그리고 홍범도 장군은 사학자가 아니면서도 운초(雲樵) 계연수(桂延壽, 1864-1920) 선생이 1911년『환단고기』를 발간할 때에 송암(松菴) 오동진(吳東振) 장군과 함께 출판비를 지원하여 오늘날 재야 민족사학자들이 국사광복운동을 전개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그런데 스탈린이 1937년 연해주의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키는 바람에 69세의 홍범도 장군은 카자흐스탄의 크질오르다로 강제이주된 이후 야간에는 고려극장의 수위로 일하고, 주간에는 정미소의 근로자로 외로운 삶을 살다가 조국의 광복을 바로 눈앞에 둔 1943년 10월 25일 76세를 일기로 한 많은 일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홍범도 장군의 부인은 일본군에 붙잡혀 고문으로 숨지고, 장남은 전사하였으며, 차남은 전투 중에 병사했다. 그래서 혈육 한점 남기지 않은 채 모든 것을 조국 해방에 바쳤다.


  그리하여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1962년에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그리고 카자흐스탄의 크질오르다에는 1982년 카자흐스탄의 한글신문 《레닌기치》 기자들과 한인들이 중심이 되어 홍범도 장군의 흉상과 3개의 기념비를 세웠다. 또한 말년에 거주하던 집은 크질오르다의 역사기념물로 지정되었고, 집 근처의 거리는 '홍범도 거리'로 지정되었으며, 카자흐스탄 국립 고려극장에서는 해마다 연극 <날으는 홍범도 장군>을 공연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3.1독립만세운동 101주년을 맞이하여 문재인정부가 지금도 카지흐스탄의 크질오르다 묘소에 잠들어 있는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봉환하여 대전국립현충원에 안장한다고 하여 언론의 주목을 받고 았다.


  한편 2019년에는 봉오동전투를 소재로 영화가 제작되어 지금도 상연되고 있고, 2020년에는 봉오동전투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기념우표가 발행된다. 그리고 2020년 6월 7일 오전에는 전쟁기념관 평화광장에서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주관으로 봉오동전투 승전 100주년 기념식이 “승리 또 승리”라는 주제로 개최되었다. 

▲     ©편집부


       봉오동전투 전승 100주년 기념식에서 축사하고 있는 정세균 국무총리 모습

  정세균 국무총리는 봉오동 전투 전승 100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다음과 같이 말해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우리 군은 100년 전 독립군의 후예들이다"며 "일제의 3.1 만세운동 탄압도 독립을 향한 우리 겨레의 의지와 집념을 꺾지는 못했고, 100년 전 오늘 독립군 연합부대와 일본 정규군 사이에 처음으로 대규모 전투가 벌어져 독립군이 대승을 거뒀다"고 말했다. 그리고 "봉오동 전투는 평범한 이들의 싸움이었다. 선조들은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군사훈련을 해 '어제의 농부가 오늘의 독립군'이 돼 위대한 승리를 쟁취했다"며 "평범한 백성들이 써 내려간 승리의 역사였다"고 말했다. 또한 "선열들의 독립정신이 6.25 전쟁 후 나라를 일으키는 힘이 되고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뿌리가 됐다. 2016년의 촛불혁명도 백성이 나라를 되찾고 바로 세우겠다는 독립정신의 표출이었다"며 "지금의 대한민국은 선열들의 염원과 희생 위에 서 있다"고 강조했다. 그런가 하면 "정부는 1920년에 시작된 무장독립투쟁의 역사를 자랑스러운 우리 국군의 역사로 기록하겠다"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관과 효창공원의 독립기념공간 건립을 차질없이 추진해, 독립운동의 역사와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국내로 모셔오는 일에도 최선을 다하겠다"고 덧붙였다.


  한편 최근 코로나19 관련 상황을 언급하며 "위기 속에서도 연대와 협력의 끈을 놓지 않고, 희생과 헌신을 마다하지 않았던 봉오동 영웅들의 숭고한 정신은 코로나19라는 유례없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고 있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홍범도 장군께서는 생전에 '국토를 회복하여 자손만대에 행복을 주는 것이 독립군의 목적이요, 민족을 위하는 본의'라고 말씀하셨다"며 "수많은 독립 선열들께서 그러셨듯이, 우리도 지금의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해 나갈 것이다"고 강조했다.

▲     © 편집부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문학평론가, 칼럼니스트) 신상구

 

 


기사입력: 2020/06/09 [12:30]  최종편집: ⓒ 천안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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